” 고통은 우리 안에 내장된 부처” 글 비구 보디_Bhikkhu Bod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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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구 보디 스님이 쓰닌 병과 아픔에 대한 글을 도움일 될까 번역했습니다. 의역이 많습니다. 번역 我无那 – 

삶의 고통에 관한 글을 쓸 때, 저는 굳이 거창한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1976년 이후부터 저는 만성두통에 시달렸고, 이것은 그 후로 몇십 년을 거쳐 점점 안 좋아졌지요. 선 수행을 하는 내내 어깨 위에 커다란 돌을 짊어진 것 같기도 했고요. 두통으로 인한 고통은 계획된 일정의 하룻낮과 밤을, 혹 길어지면 며칠의 시간을 종종 그르치게 하였지요. 그 때문에 생산적인 활동들을 할 수 있었던 수년에 상당하는 시간을 고통의 대가로 치른 것 같습니다. 극심한 두통 때문에 책을 보는 것이 어려워서 여러 번에 학승과 경전 번역가로서의 제 소명이 위태로웠습니다.

치료 방법을 찾아, 양의 의사는 물론 스리랑카의 외진 시골 마을의 약초 의사에게도 자문을 구했죠. 몸이 수없이 많은 침에 찔리기도 했고요. 만성두통을 치료하기 위해 싱가포르에서는 중국인 마사지사에게 몸을 맡겼고, 인도의 다람살라에서는 티베트 환 같은 약을 먹기도 했고, 인도네시아 발리에서는 구병시식 같은 것도 해보고, 혹은 차크라 치료사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현재 몇 가지 약에 의지해 소소한 효과를 보면서 그럭저럭 고통을 다스리고 있습니다만, 이 약들이 두통을 근본적으로 치료는 못 하죠.

고통을 오랜 친구처럼…

제 직접적인 경험으로 만성적인 몸의 통증이 어떻게 우리 내부의 정신을 좀먹는지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고통은 마음의 방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우리를 낙담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지요. 고통을 완전히 이겨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저는 이것을 오랜 친구처럼 여기며 살아왔고, 그래서 여태까지 견딜 수 있게 도움이 되었던 몇 가지 지침들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육체적 고통과 고통에 반응하는 그 마음을 잘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비록 몸과 마음이 아주 긴밀하게 엮여 있지만, 마음이 굳이 함께 몸의 섭리를 따를 필요는 없죠. 말하자면 몸이 고통을 느낄 때, 마음은 그 고통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섭니다. 마음이 몸의 고통에 끌려가는 대신에, 다만 그 고통을 잘 바라봅니다. 그러면 오히려 마음이 고통을 역으로 돌려세워 고통을 내적 성장을 위한 방법으로 변화시킬 수 있죠.

부처님께서는 육신의 통증에 시달리는 것을 사람이 화살에 맞는 것으로 비교하셨습니다. 육신의 고통에 더해진 미움, 불만족, 우울, 자기연민 등의 정신적 고통은 두 번째 화살에 맞는 것과 비슷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첫 번째 화살을 맞는 것에서 멈추지요. 그냥 통증을 그것의 진짜 이름, 육체적 고통이라 부르는 것만으로도, 누구든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발전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해서 폐부를 찌르는 듯한 깊은 상처로 고통 당하는 것을 모면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엄격하지만 동시에 설득력이 있는 스승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저의 만성두통은 고성제의 진리를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돌아보게 하는 일종의 내장된 부처님이죠. 이러한 스승이 함께하기에 나는 굳이 2500년 전의 부처님께서 베나레스 사슴 공원에서 하신 법문을 굳이 참조하지 않아도 됩니다. 모든 느껴지는 것은 고통이라고 선언하신 당시 부처님 말씀의 여운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저 내 머릿속의 느껴지는 고통의 자극에 집중만 하면 됩니다.

고통은 우리 안의 스승이자 부처

법을 따르는 부처님 제자로서, 나는 인과의 법칙을 철저히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 겪고 있는 이 고통의 상태를 전생에 스스로 지은 안 좋은 행위의 결과가 지금의 삶에 나타나는 것으로 받아들이죠. 하지만 방금 한 제 말이 심각한 병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인과로 모든 책임을 돌려라 그리 조언을 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재의 고통이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 피할 수 없는 결과이긴 하지만, 적절한 의학적 치료에 의해 효과적으로 고칠 수 있는, 하나의 결과가 따르는 현재의 원인같은 것이죠.

그러나 시도했던 여러 종류의 치료가 고집스럽고 완강하게 저항하는 병의 상태를 호전시키지 못하고 실패했을 때, 사람은 분명 전생의 업에 그 원인이 있을 거라 확신을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잠을 못 이루면서 내 전생의 업이 뭐였을까를 알려고 고민하지도 않을뿐더러, 업이라는 문제에 집요하게 골몰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에게 조언하기도 합니다. 업의 문제들은 쉽게 자기기만의 환상과 미신적 의례에 이끌기도 하거든요. 어떤 경우든지, 인과의 법칙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미래의 건강을 위한 열쇠는 우리 각자의 손에 달려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악한 동기에 의해 남을 해치려는 행동을 억제하고 다른 이의 행복과 안녕을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행동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을 상기시킵니다.

만성적인 고통은 우리의 성품에 깊이를 더하고 강인함을 주는 자질들을 개발함에 자극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고통은 어깨에 짊어진 짐 대신에 축복이 될 수가 있죠. 물론 통증을 치료할 적절한 방법을 찾기 위해 우리의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성 통증을 해결하기 위해 들인 제 노력은 인내, 용기, 결의, 평정심, 그리고 자비를 기르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고통이 저를 무력화시키는 때때로, 저는 모든 책임을 던져버리고 그저 수동적으로 이 고통스러운 운명에 나를 맡겨버릴까 하는 유혹을 자주 느꼈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관련된 모든 걱정을 제쳐놓고 인내로 견딜 때 결국에는 그 고통이 견딜 수 있을 만큼 가라앉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후로부터 저는 좀 더 현실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 효과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만성 두통은 인내, 용기, 결의, 평정심, 그리고 자비를 기르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제가 겪은 만성 통증의 경험은 고통이 얼마만큼 인간의 조건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가를 저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였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편리함과 편안함에 습관이든 사람들은 이 중요한 사실을 잊기가 쉽지요. 만성 통증은 배고픔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수억 명의 사람의 마음과 혹은 가족들에게 필요한 물을 길어 몇십 리를 걸어가야 하는 여인들의 마음과 혹은 열악한 장비와 부족한 일력의 병원에서 그저 멍하니 누워 벽을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제삼세계의 아픈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읽고 쓰고 말하기가 곤란할 만큼 고통이 가장 극심한 때조차 그 고통이 제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저는 노력을 했고, 또한 나의 서원들, 특히 생이 끝날 때까지 출가의 삶을 살려는 나의 서원을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고통이 나의 머리를 쪼개는 듯하고 내 어깨를 짓누를 때, 나는 명상을 통하여 이 고통의 느낌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고통이 동반하는 느낌들을 일종의 외부적인 사건으로, 또는 여러 조건의 힘에 따라 심하게 혹은 약하게 일어나는 과정들, 또는 제각각의 성질, 질감, 혹은 맛을 가진 느낌들로 바로 보게 도와주었습니다.

고통은 내가 아니다…

내가 찾은 고통의 영향을 완화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 자주 반복되어 나오는 짧은 명상적 관용구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과거 현재 미래의 어떠한 감정이든, 모든 감정은 내 것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진정한 나 또한 아니다.” 이 방법을 써서 효과를 봄에는 깊은 삼매가 필요치 않으며, 또한 경계의 성취를 통한 심오한 지혜를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나를 돌아보는 명상의 동안에 이 관용구를 이용하면 나로부터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의 경험을 분리하게 끔 도와줍니다.

이와 같은 명상은 고통이 마음 가운데서 나와 고통을 연결하여 동일시하는 힘을 허용하지 않기에 평정과 인내를 확립합니다. 비록 이 방법은 긴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고통은 내 것이 아니고, 나가 아니고, 전정한 나가 아니다’하는 이 세 가지 명상의 어구가 진정 힘을 얻을 때 고통은 그 자극하는 힘을 잃고, 이 틈 사이로 고통의 끝으로 가는 문이 열리며, 그 문은 결국 궁극적 자유에 다다릅니다.

— 번역 我无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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