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금강경 – 3

“또 수보리야, 보살은 법에 대하여 마땅히 머물러 있는 생각 없이 보시(布施)를 해야 하나니, 이른바 색(色)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 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囑)ㆍ법(法)에도 머무르지 않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멈추지 않고 밀려오는 시간 저 앞에 어떤 운명의 복잡함이   다가 올지 모르는 우리의 삶은 자주 불안합니다. 불안함은 종종 현실이 되고 우리의 가슴 식은땀에 젖지요. 혼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삶의 사소한 어려움이 있는 가운데, 내 능력의 바깥 일들로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도움을 청하려 주위를 돌아보면 그제야 매끄럽지 못한 내 사람과의 관계가 후회스럽습니다. 후회와 자존심에 주저하면서 그래도 살아야 하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주변에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냉정해 보이지만 또 한편 자비로 충만한 세상은 언제나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보입니다.

때때로 절박한 도움이 필요한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주위 누군가로부터 도움의 요청을 받습니다. 도와달라 청하는 사람의 간절한 눈빛에 이런저런 생각과 계산으로 우리의 마음은 복잡해집니다. 도와줄 충분한 능력이 되어도, 혹 되지 못해도, 여러 정황을 고려해야 할 것 같은 세상살이의 복잡함때문이지요. 하지만 생각의 복잡함과 계산을 뒤로 하고 우리 마음 가운데의 자비는 팔 걷어붙이고 저기 넘어져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얘기합니다.

이렇게 받고 주는 일은 우리의 일상이며, 내가 가진 물질과 능력을 다른 존재들과 함께 나누어 갖는 것을 우리 절집에서는 보시라 지칭합니다. 금강경의 시작, 법회인유분이 그리는 부처의 삶 역시 주고 받는 사람사이 관계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철저한 수행을 통해 진리를 체득한 분이지만, 부처는 아직 살아있는 몸의 유지를 위해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받아 삶을 연명해야 합니다. 매일 고요한 걸음으로 부처는 마을로 향했고, 음식을 받기 위해 발우를 안고 담담히 여느 집의 문 앞에 서서 집안의 인기척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부처를 맞은 마을 사람들은 부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것입니다.

금강경의 묘행무주분은 보시의 마음가짐에 관한 얘기를 하며, 머무름이 없는 마음의 보시를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머무름이 없는 마음의 보시, 집착 없는 보시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마음 씀을 말하는 것일까요?

수보리야, 보살은 이렇게 보시를 행하여 상(相)7)에 머물지 않아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이겠는가? 만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福德)을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동쪽에 있는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쪽ㆍ서쪽ㆍ북쪽과 네 간방[四維]과 위아래에 있는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일이 끝나고도 마음에 무언가 석연찮은 여운이 남는 것을 소위 ‘뒤끝”이라 하지요.  뒤끝때문에 과거는 죽지 않고 망령처럼 현재로 살아 돌아옵니다. 오래 전에 받은 사소한 상처조차 오늘처럼 생생하여 가슴이 저려옵니다. 시간과 함께 말끔히 씻겨가지 못하는 마음의 앙금들,  뒤끝은 우리가 하는 좋은 일들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일보다, 내가 누군가에게 준 일을 오래 기억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는 선행, 보시에도 뒤끝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고, 그 주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테지요. 그 주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소위 생색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라는 어는 드라마의 대사처럼 생색은 나에 대한 집착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묘행무주분은 그 생색을 내는 마음의 선행, 보시를 꾸짖고 있습니다.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않는 보시란 쉽게 말해 생색을 내지 않는 보시를 말하며, 주고도 내가 받을 이익을 고려하거나 계산하지 않는 선행이며, 주고도 내가 받을 손해를 생각하지 않는 선행이며, 주고도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 선행입니다.

삶의 잦은 실수, 잘못된 행동과 함께 우리를 자주 부끄럽게 하는 것은 항시 생색을 내며 사는 내 마음의 그릇이 작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집에 김치 한 봉지 갖다 주고 그 김치가 맛있지 않았냐고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사람입니다. 정성으로 자식을 키운 부모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자식의 삶에 대해 애착을 드러냅니다. 나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상식에서 보자면 생색은 어쩌면 “나”를 알아달라는 하나의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공덕도 그와 같아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렇게 가르쳐 준 대로만 머물지니라.”

금강경의 묘행무주분은 생색을 내지 않는 보시의 삶과 그렇게 살아갈 때 진리의 섭리대로 받는 복의 한량없음을 얘기합니다.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공덕이라 결국 부처의 삶과 그 맥락을 같이하며 내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위대함입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쳐준 대로만” 살기를 불자에게 당부하십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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